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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도와 보고체계 없는 기업, 과연 업무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2020년대 중반부터 아마존·구글·씨티그룹이 중간관리 계층을 줄여왔고, 2026년 들어 메타(8천 명)·시스코(4천 명)·블록(4천 명) 감원으로 이 흐름이 한층 가팔라졌다. 블록 CEO 잭 도시는 2026년 3월 중간관리 계층이 영구적으로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에세이를 발표하며, 자포스 홀라크라시와 밸브의 수평 구조를 직접 검토 사례로 소환했다. 그러나 실제로 조직도를 없앤 자포스와 버퍼는 결국 관리자 역할과 '자연스러운 위계'를 다시 도입했고, 밸브조차 내부에서는 '숨은 위계' 비판이 반복돼 왔다. 성공 사례로 꼽히는 하이얼은 위계를 없앤 게 아니라, 손익 책임과 계약이라는 시장 메커니즘으로 관리 기능을 재설계한 것에 가깝다. 갤럽의 2026년 최신 데이터(글로벌 몰입도 20%, 관리자 몰입도 22%로 급락)는 문제의 핵심이 관리자의 존재가 아니라 품질이며, AI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재설계 시도조차 결국 과거 실험들이 남긴 교훈—조정·평가·육성 기능은 없앨 수 없다는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소유 책임기자입력 2026년 8월 10일수정 2026년 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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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의 지시 없이 구성원 스스로 팀을 꾸리는 방식은 밸브 같은 무관리자 조직의 핵심 원리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정과 책임의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사진 = KBR 자료사진]
관리자의 지시 없이 구성원 스스로 팀을 꾸리는 방식은 밸브 같은 무관리자 조직의 핵심 원리이지만, 그 이면에는 조정과 책임의 공백을 누가 메울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사진 = KBR 자료사진]

2020년대 중반부터 아마존·구글·씨티그룹이 중간관리 계층을 줄여왔고, 2026년 들어 메타(8천 명)·시스코(4천 명)·블록(4천 명) 감원으로 이 흐름이 한층 가팔라졌다. 블록 CEO 잭 도시는 2026년 3월 중간관리 계층이 영구적으로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에세이를 발표하며, 자포스 홀라크라시와 밸브의 수평 구조를 직접 검토 사례로 소환했다. 그러나 실제로 조직도를 없앤 자포스와 버퍼는 결국 관리자 역할과 '자연스러운 위계'를 다시 도입했고, 밸브조차 내부에서는 '숨은 위계' 비판이 반복돼 왔다. 성공 사례로 꼽히는 하이얼은 위계를 없앤 게 아니라, 손익 책임과 계약이라는 시장 메커니즘으로 관리 기능을 재설계한 것에 가깝다. 갤럽의 2026년 최신 데이터(글로벌 몰입도 20%, 관리자 몰입도 22%로 급락)는 문제의 핵심이 관리자의 존재가 아니라 품질이며, AI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재설계 시도조차 결국 과거 실험들이 남긴 교훈—조정·평가·육성 기능은 없앨 수 없다는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스 없는 회사' 실험 30년의 성적표…보이는 위계를 없애면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자란다



조직도를 없애자는 주장은 더 이상 실리콘밸리 일부 기업의 급진적 실험이 아니다. 2020년대 중반을 전후해 글로벌 기업들은 '그레이트 플래트닝(Great Flattening)'이라 불리는 흐름 속에서 중간관리 계층을 빠르게 줄여 왔다. 데이터 분석기업 라이브 데이터 테크놀로지스(Live Data Technologies)의 고용 기록 분석에 따르면, 2022년 5월부터 2025년 5월 사이 미국 상장기업의 관리자 직급 인원은 약 6.1% 감소했다. 중소기업 급여 플랫폼 거스토(Gusto)가 자사 페이롤 데이터 8,500개 표본을 분석해 2025년 6월 공개한 자체 보고서에서는, 관리자 1인이 담당하는 직속 인원이 2019년 약 3명에서 2024년 3분기 기준 약 6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가트너는 2026년까지 조직 다섯 곳 중 한 곳이 AI를 활용해 조직 구조를 평탄화하고 중간관리직의 절반 이상을 줄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개별 기업의 움직임은 더 구체적이다. 아마존의 앤디 재시 CEO는 2024년 9월 사내 공식 메모에서 실무자 대비 관리자 비율을 2025년 1분기까지 최소 15% 높이겠다고 공언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가 입수한 사내 전체회의 녹취록에 따르면 아마존은 대규모 해고 대신 팀 통합과 관리자의 실무자 전환을 통해 이 목표를 3월 말까지 달성했다고 재시가 직접 밝혔다. 구글 역시 인사분석 담당 임원 브라이언 웰이 사내 전체회의에서 직접 밝힌 내용을 CNBC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직속 인원이 3명 미만인 소규모 팀을 이끌던 관리자를 최근 1년 새 35% 줄였으며(이 중 다수는 해고가 아니라 실무자로 전환됐다), 씨티그룹은 제인 프레이저 CEO 주도로 13개에 달하던 관리 계층을 8개로 줄이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가 남긴 "관리자가 관리자를 관리하는 구조는 원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이 시기 경영진의 정서를 압축한다.

2026년 들어 이 흐름은 한층 가팔라졌다. 메타는 5월 AI 인프라 투자 재원 마련을 이유로 전체 인력의 약 10%인 8천 명을 감원했는데, 그 대상은 중간관리자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에 집중됐고 남은 조직은 '팟(pod)'이라 불리는 소규모 팀 단위로 재편됐다. 같은 달 시스코도 약 4천 명 규모의 감원을 발표했다. 결제기업 블록(Block)은 2월 전체 인력의 약 40%인 4천여 명을 줄인 뒤, 3월 말 창업자 잭 도시가 세쿼이아캐피털의 로엘로프 보타와 함께 발표한 에세이 '위계에서 지능으로(From Hierarchy to Intelligence)'를 통해 아예 중간관리 계층이 영구적으로는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에세이가 스포티파이의 스쿼드 모델, 자포스의 홀라크라시, 밸브의 수평 구조 등 과거 실험들을 직접 검토 대상으로 언급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AI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조직 재설계 시도조차, 결국 이 글이 다루는 지난 실험들로 되돌아가 그 성패를 되짚고 있는 셈이다.

이런 흐름의 논리적 종착점에 놓인 질문이 있다. 관리자를 줄이는 수준을 넘어, 아예 조직도와 보고체계 자체를 없앤 기업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30년 가까이 축적된 기업 사례들이 쌓여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직도 없는 회사'는 존재할 수 있지만 '구조 없는 회사'는 장기간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 사례들이 시사한다.


조직도를 지운 회사들, 무엇을 시도했나

가장 오래된 사례는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을 운영하는 밸브(Valve)다. 2012년 공개된 신입사원 핸드북은 "우리는 1996년부터 보스가 없었다"며, 공식 관리자가 없고 누구도 누구에게 보고하지 않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직원들은 바퀴 달린 책상을 끌고 다니며 스스로 참여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선택하고, 프로젝트를 제안한 사람이 동료를 모아 팀을 꾸린다는 것이다. 성과 평가와 보상 역시 동료 평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밸브는 2026년 4월 게재된 재직 경험 후기 등 최근 보도들에서도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관리자 직함 없는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회사 측의 공식 발표라기보다 관찰자·전현직 구성원의 서술에 의존한 것이다.

더 극적인 실험은 온라인 신발 유통기업 자포스(Zappos)에서 벌어졌다. 창업자 토니 셰이는 2013년 초 인사팀을 대상으로 홀라크라시(Holacracy) 시범 도입을 시작했고, 그해 11월 4분기 전사 미팅에서 약 1,500명 전체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초 목표는 2014년 안에 전환을 마치는 것이었다. 홀라크라시는 관리자와 직급, 전통적 조직도를 없애고 '서클'이라 불리는 자율 단위에 권한을 분산하는 경영 시스템이다. 부서장도, 부사장도, 공식 상사도 없는 구조였다. 자포스는 이 모델을 도입한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이 됐고, 한동안 '보스 없는 회사'의 상징으로 통했다.

소셜미디어 관리 도구 기업 버퍼(Buffer)도 프레데릭 라루의 저서 '조직의 재창조'에 영감을 받아 관리자와 직함을 없애는 자기경영(self-management) 체제를 실험했다. 구성원이 스스로 급여 조정에 참여하고, 상사의 지시 대신 협업과 합의로 일하는 방식이었다.


실험의 결말, 구조는 다시 돌아왔다

이 실험들의 이후 경과는 시사적이다. 그러나 2014년 목표는 지켜지지 않았고, 병행 운영이 길어지자 셰이는 2015년 3월 전 직원에게 새 체제에 전념하거나 퇴직 보상을 받고 떠나라는 최후통첩 메모를 보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구성원의 약 14~18%가 회사를 떠났다. 이후 자포스는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미국 경제매체 쿼츠 보도에 따르면 자포스는 형식주의적으로 변해버린 홀라크라시 회의 체계를 폐기하고 관리자 역할을 다시 도입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정황 증거로도 뒷받침된다. 채용 정보업체 빌트인(Built In)에 게재된 자포스의 최근 채용 공고에는 '시니어 매니저', '마케팅 매니저' 등 관리자 직함이 실제로 등장하고, 기업정보업체 CB인사이츠 자료에도 자포스의 현직 부사장 등 전통적 임원 직함이 확인된다. 홀라크라시 도입을 이끌었던 임원 존 번치는 이후 회사 구조를 홀라크라시가 아니라 각 팀이 손익을 책임지는 '시장 기반 생태계'로 설명했다. 2026년 발표된 한 회고 분석은 자포스에 서클과 '팀 리드'라는 홀라크라시식 명칭은 남아 있지만, 의사결정은 구조와 책임, 리더십이 결합된 익숙한 방식으로 되돌아갔다고 진단한다.

버퍼의 회고는 더 직설적이다. 공동창업자 레오 위드리치는 약 1년간의 자기경영 실험을 돌아보며 구성원들이 상위 차원의 비전과 목표 설정 없이 주어진 자유에 압도당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자기경영이 강한 회사일수록 더 많은 구조가 필요하다"는 역설적 교훈을 남겼고, 버퍼는 전략과 방향을 제시하는 '자연스러운 위계'를 다시 받아들였다. 구조와 위계는 같은 말이 아니며, 구성원들이 오히려 구조를 원한다는 사실을 배웠다는 것이 창업자 조엘 개스코인의 정리다.

공식적으로 무관리자 체제를 표방하고 있는 밸브조차 내부 평가는 엇갈린다. 탐사 저널리즘 채널 피플 메이크 게임스(People Make Games)의 2023년 조사 보도와 다수의 전직 직원이 남긴 글래스도어 후기 등은 밸브의 수평 구조 이면에 영향력 있는 그룹이 실질적 결정권을 쥐는 '숨은 위계'가 존재한다고 지적해 왔다. 한 전직 직원은 이 회사를 '유사 수평 구조'라고 표현했다. 다만 이는 전·현직 구성원의 증언에 근거한 비판이며, 조직 데이터로 확정된 사실은 아니다. 공식 조직도가 사라진 자리에 비공식 권력 구조가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은 1972년 사회학자 조 프리먼이 '구조 없음의 폭정(The Tyranny of Structurelessness)'이라는 글에서 이미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명시적 규칙과 위계를 없애도 권력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책임을 묻기 어려운 비공식 네트워크로 옮겨갈 위험이 있다는 것이 이 비판의 핵심이다.


예외처럼 보이는 하이얼, 사실은 가장 정교한 구조

반대편에는 성공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중국 가전기업 하이얼(Haier)이 있다. 하이얼은 2005년부터 '런단허이(人單合一)' 모델을 도입해 중간관리 계층을 사실상 해체했다. 장루이민 전 회장은 맥킨지 인터뷰에서 1만 2천 명이 넘는 중간 계층을 없앴다고 밝혔고, 8만 명 규모의 조직은 약 4천 개의 마이크로엔터프라이즈(소기업)로 재편됐다. 각 소기업은 독립적인 손익계산서를 갖고 시장 혹은 사내 다른 소기업과 직접 계약하며, 의사결정권과 채용권, 이익 분배권을 스스로 행사한다.

주목할 점은 하이얼이 '구조가 없는 회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이얼은 상사와 보고라인이라는 구조를 계약과 시장 메커니즘이라는 또 다른 구조로 대체했다. 각 단위의 책임 소재는 손익이라는 숫자로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성과를 내지 못한 소기업은 자원을 배정받지 못한다. 장루이민 스스로도 이 모델을 도입하려면 의사결정권과 인사권, 보상 결정권을 모두 현장에 넘겨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업이 따라 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위계를 없앴다기보다, 위계가 하던 일을 시장 메커니즘이 대신하도록 시스템을 재설계한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데이터가 말하는 것, 문제는 관리자의 존재가 아니라 품질이다

보고체계 무용론이 놓치기 쉬운 데이터도 있다. 갤럽은 '미국 관리자 보고서'(2015) 이후 여러 조사에서 팀 간 몰입도 차이의 최소 70%가 관리자 요인으로 설명된다는 분석을 반복적으로 확인해 왔다. 갤럽이 2026년 발표한 '글로벌 직장 현황 2026'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글로벌 직원 몰입도는 20%까지 떨어져 2020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2년 23%였던 몰입도가 2년 연속 하락한 결과다. 하락의 핵심 배경으로 갤럽이 지목한 것은 관리자 몰입도의 급락이다. 관리자 몰입도는 2022년 31%에서 2024년 27%를 거쳐 2025년 22%로 떨어졌고, 그중에서도 2024년에서 2025년 사이의 하락 폭(5%포인트)이 가장 컸다. 저몰입으로 인한 전 세계 생산성 손실은 약 10조 달러, 글로벌 GDP의 9% 수준으로 추산됐다.

특히 갤럽은 이 보고서에서 조직 평탄화의 부작용을 직접 언급했다. 관리자 몰입도가 8%포인트 급락한 남아시아 지역의 사례를 분석하며, 관리자 비중 축소와 관리 범위 확대가 그 배경일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갤럽은 조직 평탄화가 단순한 인건비 거래가 되어서는 안 되며, 관리자와 팀의 몰입, 관리자의 업무 범위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AI와의 연결이다. 갤럽의 2026년 1분기 미국 조사에서 직원의 AI 활용을 가장 강하게 예측하는 변수는 기술 인프라를 제외하면 직속 관리자가 AI 활용을 적극 지지하는지 여부였다. 관리 계층을 걷어내는 명분이 된 AI 전환조차, 실제로는 관리자를 통해 확산된다는 조사 결과는 역설적이다.


HR이 점검해야 할 세 가지, 관리 범위·역할 재정의·정보 인프라

이 질문은 한국 기업에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직급 단계를 축소하고 호칭을 통일하는 조직 개편이 대기업과 스타트업을 가리지 않고 이어져 왔고, 팀장 한 명이 담당하는 인원과 업무 범위는 꾸준히 넓어지는 추세다. 겉으로는 수평 조직을 표방하면서 실제 의사결정은 여전히 소수 임원에게 집중되는, 이른바 '무늬만 수평'에 대한 구성원들의 피로감도 낯설지 않다. 해외 실험들의 교훈이 국내 HR에 던지는 질문은 결국 같다. 계층을 줄인 만큼 권한도 함께 내려보냈는가, 그리고 사라진 계층이 하던 일을 누가 맡을지 설계했는가.

이 논의를 실무 점검의 언어로 옮기면 목록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관리 범위(span of control)의 한계선이다. 거스토의 데이터처럼 관리자 1인의 담당 인원이 단기간에 두 배로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계층을 줄이기 전에 남는 관리자가 감당할 수 있는 팀 규모와 업무 범위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 지난달 말 포브스 인사관리협의회에 실린 한 칼럼은 AI가 조정 업무를 흡수한 만큼 관리자들이 더 큰 팀을 코칭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탄화 옹호론의 이면에서, 정작 그 코칭에 필요한 시간과 역량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계산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갤럽 역시 관리 범위가 커질수록 관리자 자신의 몰입이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평탄화를 결정할 때 관리자의 여타 책임까지 함께 설계하라고 권고한다. 계층 축소로 절감한 인건비가 남은 관리자의 번아웃과 팀 이탈로 상쇄된다면 재무적으로도 남는 장사가 아니다.

둘째는 관리자 역할의 재정의다. 버퍼와 자포스 사례에서 드러난 구성원들의 불만은 통제와 결재 중심의 관리였지, 방향 제시와 육성 중심의 관리가 아니었다. 보고서 취합과 일정 조율처럼 AI가 흡수할 수 있는 조정 업무를 걷어낸 뒤 관리자에게 남는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평가와 보상 체계에 어떻게 반영할지가 조직 설계의 핵심 질문이 된다. 셋째는 정보 인프라다. 하이얼의 소기업 모델과 버퍼의 급여 공개가 공통적으로 전제한 것은 급진적 수준의 정보 투명성이었다. 누가 무엇을 왜 결정했는지 모두가 볼 수 있는 시스템 없이 보고체계만 없애면, 정보는 비공식 네트워크를 타고 흐르며 그 자체가 새로운 권력이 된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조직도가 필요한가'에서 '조정 비용을 누가 지불하는가'로

그렇다면 조직도와 보고체계 없는 기업은 업무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30년 가까이 쌓인 기업 사례들이 주는 답은 조건부에 가깝다. 소규모이고, 구성원의 자기주도성이 높고, 제품이 시장에서 압도적 위치를 점한 기업이라면 상당 기간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밸브의 장기 존속이 보여 준다. 다만 이는 검증된 성공 공식이라기보다 관찰된 사례 하나에 가깝다. 무관리자 체제 자체가 성과의 원인이라는 인과관계가 입증된 것은 아니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밸브 내부에서도 비공식 권력이 실질적 결정권을 쥔다는 증언은 반복돼 왔다. 그 경우에도 조정과 평가, 방향 설정이라는 관리 기능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식 구조가 없으면 그 기능이 비공식 권력이나 반복되는 회의, 소수의 암묵적 실력자에게로 옮겨갈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 앞서 살펴본 밸브·자포스 사례에 대한 비판이 공통적으로 짚는 지점이다.

반대로 자포스와 버퍼의 궤적은 위계 제거가 목적이 될 때 조직이 치르는 대가를 보여 준다. 두 회사 모두 실험을 통해 배운 것은 '관리자를 없애는 법'이 아니라 '구조와 위계를 구분하는 법'이었다. 두 회사의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았던 것은 구조 자체가 아니라 나쁜 관리, 즉 병목이 되는 결재선과 통제 중심의 보고였다. 하이얼의 사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전통적 보고체계를 없애려면 그보다 더 정교한 대체 시스템, 즉 명확한 손익 책임과 계약 관계, 투명한 정보 공유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2026년의 경영 환경에서 이 질문은 더 이상 이론적이지 않다. 메타와 블록의 사례에서 보듯, AI가 보고서 취합과 일정 조율 같은 조정 업무를 흡수하면서 많은 기업이 관리 계층 축소를 실제 조직 개편으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갤럽의 데이터와 지난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조직도는 없앨 수 있어도 조직도가 하던 일은 없앨 수 없다. 방향 제시, 이해관계 조정, 평가와 육성이라는 기능을 누가, 어떤 시스템으로 대신할지에 대한 설계 없이 보고체계부터 걷어내는 기업은, 눈에 보이는 위계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위계와 더 비싼 조정 비용을 얻게 될 가능성이 크다. 조직도 없는 회사가 돌아가느냐는 질문의 진짜 답은, 결국 그 회사가 위계를 지웠느냐가 아니라 위계의 기능을 어디에 다시 새겼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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