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는 사라져도 데이터는 남는다: 백래시 시대의 공시 지형도 — ESG 백래시 이후의 지속가능경영
연방 차원의 후퇴와 글로벌 공시 표준의 확산이 동시에 진행되는 2026년, 지속가능경영의 무게중심은 '구호'에서 '데이터'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한 해에 두 방향으로 갈라진 ESG
2026년 상반기 ESG를 둘러싼 풍경은 모순처럼 보인다. 한쪽에서는 미국 연방정부가 기후·ESG 규제를 빠르게 거둬들이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 세계 자본시장이 더 정교하고 검증 가능한 지속가능성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다. 'ESG'라는 단어는 정치적 부담이 큰 용어가 되어 기업 보고서에서 점점 사라지는 반면, 그 단어가 가리키던 실체 — 온실가스 배출량, 기후 리스크, 거버넌스 정보 — 는 오히려 '제2의 재무제표'로 제도화되고 있다. 이 글은 ESG 백래시(backlash) 이후 지속가능경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 기업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2026년 6월 시점의 확정된 사실관계를 기준으로 정리한다.
미국의 후퇴: 규제는 거둬들여지고, 자금은 빠져나간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2026년 5월 29일, 2024년 3월에 채택했던 '기후 관련 공시 규칙(Climate-Related Disclosure Rules)'을 전면 폐지하는 방안을 공식 제안했다(Release No. 33-11421). 이 제안은 6월 3일 연방관보(Federal Register)에 게재됐으며, 의견수렴 기한은 8월 3일까지다. 즉 현재 시점에서 규칙은 '폐지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 '폐지 절차가 진행 중'인 상태다. 폴 앳킨스(Paul Atkins) SEC 위원장은 공시 의무가 '중요성(materiality)'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2024년 규칙은 SEC의 법적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SEC는 규칙 폐지 시 향후 10년간 연평균 약 49억 달러의 규제 비용이 절감될 것으로 추산했다. 앞서 SEC는 2025년 3월 해당 규칙에 대한 법적 방어를 포기했고, 관련 소송은 제8연방항소법원에서 보류된 바 있다.
시장의 자금 흐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투자회사협회(ICI) 데이터를 분석한 드래곤GC(DragonGC)에 따르면, 'ESG'로 분류된 펀드에서는 2026년 1월에만 약 9억 3,500만 달러가 순유출됐으며, 이는 14개월 연속 순유출이었다. 글로벌 은행들의 ESG 조직 축소도 이어지고 있어, 2026년 6월에는 UBS가 아시아 지역 ESG 인력을 절반가량 감축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기업의 언어도 달라졌다. 미국 컨퍼런스보드(Conference Board) 분석에 따르면, S&P 100 대기업 가운데 연차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ESG'라는 용어를 사용한 비율은 2023년 40%에서 2024년 25%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 침묵이 곧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에코바디스(EcoVadis) 2025년 조사에서는 미국 기업의 약 87%가 규제 불확실성 속에서도 지속가능성 관련 지출을 유지하거나 늘린 것으로 나타났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50대 기업 중 71%가 'ESG' 언급을 줄이면서도 기후 목표는 유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른바 '그린허싱(greenhushing)' — 성과를 내면서도 정치적 역풍을 피하기 위해 말을 아끼는 현상 — 이 미국 기업의 표준 전략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그러나 시장은 데이터를 요구한다: ISSB라는 글로벌 베이스라인
연방 규제가 후퇴하는 사이, 글로벌 공시 표준은 빠르게 단일화되고 있다.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2023년 6월 발표한 IFRS S1(지속가능성 관련 재무정보 일반 요구사항)과 IFRS S2(기후 관련 공시)는 사실상 '투자자용 글로벌 기준선'이 되고 있다. S&P글로벌 집계에 따르면, 2026년 4월 22일 기준 28개 관할권이 자발적 또는 의무 기준으로 ISSB 기준을 채택했고, 추가로 12개 관할권이 도입을 준비 중이다. ISSB 측은 도입을 추진하는 관할권이 전 세계 GDP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밝혀 왔다. 국제증권감독기구(IOSCO)는 이미 2023년 ISSB 기준을 승인하고 130여 개 회원 관할권에 채택을 권고한 바 있다.
중요한 점은 미국의 다국적기업조차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연방 차원의 의무가 사라져도, 해외에 상장된 자회사나 EU·아시아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법인은 현지 공시 의무를 피할 수 없다. 미국 내부에서도 캘리포니아주의 SB 253(온실가스 배출량 공시)과 SB 261(기후 재무 리스크 공시)이 주(州) 차원의 공시 압력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연방은 빠지되 시장과 지방정부, 글로벌 규제가 빈자리를 메우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데이터의 '양'만이 아니라 '질'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국제감사인증기준위원회(IAASB)가 채택한 지속가능성 인증 표준 ISSA 5000은 지속가능성 정보에 대한 제3자 검증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투자자들은 더 이상 선언적 목표가 아니라 검증된 수치를 원하며, 이것이 '말을 아끼는' 그린허싱 전략의 근본적 한계다. 데이터가 검증 가능해질수록, 침묵은 정보의 부재로 읽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ISSB는 2026년 4분기 중 자연(생물다양성) 관련 공시 가이드를 IFRS 실무서(Practice Statement) 형태로 제안할 예정이며, 자연 리스크 공시 프레임워크인 TNFD의 작업을 토대로 삼는다. 기후를 넘어 자연자본으로 공시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EU의 '완화 속 유지': 옴니버스가 보낸 신호
유럽연합(EU)의 행보는 'ESG 규제가 무조건 강화된다'는 통념과 '백래시로 규제가 무너진다'는 반대 통념을 모두 비껴간다. EU 이사회는 2026년 2월 24일 옴니버스 I(Omnibus I) 간소화 패키지를 최종 승인했고, 이는 2월 26일 관보에 'Directive (EU) 2026/470'으로 게재돼 3월 18일 발효됐다. 이 개정으로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의 적용 대상은 '직원 1,000명 초과 및 순매출 4억 5,000만 유로 초과' 기업으로 상향됐다. 다수 로펌은 이로 인해 약 80%의 기업이 CSRD 의무 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추산한다. 새 기준은 2027년 1월 1일 이후 시작하는 회계연도부터 적용되며, 첫 보고는 2028년에 이뤄진다.
그러나 핵심은 '대상은 줄었지만 골격은 유지됐다'는 점이다. 이중 중요성(double materiality) 원칙 — 기후가 기업 재무에 미치는 영향과, 기업이 환경·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양방향으로 보고하는 원칙 — 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기업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은 '직원 5,000명 초과 및 순매출 15억 유로 초과'로 대상이 더 좁아졌고 적용 시점도 2029년 7월로 미뤄졌으며, 기후 전환계획 '이행' 의무는 삭제됐다. 다만 제한적 인증(limited assurance) 기준은 별도로 마련하도록 했다. 요컨대 EU는 보고 부담은 덜되, 대형사와 역외 대기업에 대한 핵심 공시 의무는 끝까지 붙잡았다.
한국의 시계는 거꾸로 돌지 않는다
미국의 후퇴와 EU의 간소화 사이에서, 한국은 오히려 제도화의 시계를 본격적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회계기준원 산하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는 2026년 2월 26일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서 제1호(KSDS 1)와 제2호(KSDS 2)를 최종 의결했다. 두 기준은 ISSB의 IFRS S1·S2를 기반으로 하며, 이로써 '국내 기준이 없다'는 가장 큰 불확실성이 해소됐다.
하루 앞선 2월 25일, 금융위원회는 제4차 '생산적 금융을 위한 대전환 회의'에서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 로드맵(안)을 공개했다. 이 로드맵(안)에 따르면 2028년(2027 사업연도)부터 연결자산총액 3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약 58개사)를 시작으로 의무공시가 도입되고, 2029년에는 10조 원 이상으로, 이후 2033년에는 코스피 전체 상장사로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가장 부담이 큰 스코프 3(가치사슬 배출량)는 의무공시 시작 후 3년의 유예를 둬 1차 대상 기준 2031년(2030 사업연도)부터 공시하도록 했다. 제3자 인증은 초기에는 자율로 운영하되 국제 동향에 맞춰 단계적 의무화를 검토한다. 공시 방식은 초기 거래소 공시에서 출발해,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사업보고서 기재사항(법정공시)으로 전환하는 2단계 구조다. 다만 이 로드맵은 의견수렴을 거쳐 2026년 상반기 중 최종 확정하는 일정으로 제시된 만큼, 세부 적용 대상과 시점은 최종안에서 일부 조정될 수 있다.
세 개의 블록, 그러나 같은 방향의 신호
미국·EU·한국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듯 보인다. 미국은 연방 규제를 거둬들이고, EU는 적용 범위를 좁히며, 한국은 의무화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세 블록이 보내는 신호의 방향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어디서도 '기후·지속가능성 데이터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단어를 지우면서도 사업보고서의 위험 요인 항목에서는 기후 리스크를 더 자주 언급하고, EU는 대상을 줄이면서도 이중 중요성의 골격은 사수했으며, 한국은 ISSB 기준을 토대로 '제2의 재무제표'를 제도화하고 있다. 정치적 수사는 나라마다 출렁이지만, 자본시장이 요구하는 '비교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데이터'라는 본질은 흔들리지 않는다.
KBR Insight - 백래시 이후의 질문은 '믿느냐'가 아니라 '증명하느냐'다
2026년의 ESG 백래시가 드러낸 것은 'ESG가 끝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ESG가 '가치의 언어'에서 '리스크의 언어'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사라지는 것은 'ESG'라는 단어이지 데이터가 아니다. 컨퍼런스보드 분석이 보여주듯, 'sustainability'라는 단어는 주주총회 안건에서는 줄었지만 정작 사업보고서의 위험 요인 항목에서는 오히려 늘었다. 기업이 ESG를 가치 선언이 아니라 재무 리스크로 재분류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기업에 주는 함의는 분명하다. 첫째, 용어 논쟁에 휘말리지 말고 데이터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 2028년 첫 의무공시를 위해서는 2027 사업연도 데이터가 필요하고, 그 데이터를 수집·검증하려면 늦어도 2026년 하반기에는 내부 시스템 구축이 시작돼야 한다. 둘째,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한 전략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검증 표준이 자리 잡을수록 침묵은 '숨길 것이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셋째, 미국의 후퇴를 '한국도 늦춰도 된다'는 신호로 오독해서는 안 된다. EU 역외 공시 의무, ISSB 확산, 글로벌 공급망의 데이터 요구는 미국 연방 규제와 무관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백래시 이후의 경쟁력은 'ESG를 얼마나 잘 말하느냐'가 아니라 '지속가능성 데이터를 얼마나 신뢰성 있게 증명하느냐'에서 갈린다. 시장은 신념을 묻지 않는다. 시장은 데이터를 요구한다.

![미국의 ESG 백래시에도 글로벌 자본시장은 환경·사회·지배구조 정보를 비교 가능하고 검증 가능한 데이터로 요구하고 있다.
[이미지 = KBR 자료 이미지]](https://epzvqcvbpcduaglyoici.supabase.co/storage/v1/object/public/news-images/articles/2026/06/27/1782526216322-749de29e-7775-445e-817d-4507cddafa8b.jpg)